아씨시의 성 프란시스
프란시스는 1181년 또는 1182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일련의 꿈과 계시를 겪고 난 뒤에 그는 하느님께서 그를 극단적인 가난의 삶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프란시스는 곧 형제들의 수도회를 건립하였고 이는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교회의 변혁을 이끌어 내었고 사랑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결국 예수의 지상에서의 삶을 따르고 설교하며 치유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성공한 포목점 주인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전 유럽에 걸쳐 교역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고 상인들이 항구나 새로운 도로망의 교차로에 자리 잡으면서 새로운 도시들이 생겨나는 시기였습니다. 이 때문에 도시로 인구가 급속도로 유입되었고 따라서 시골지역에서 도시지역으로 힘의 균형이 이동하는 시기였습니다.
이전까지 봉건제는 가장 중요한 사회체제였습니다. 봉건제하에서 모든 사람들은 해당 지역의 영주, 대지주, 주교 또는 수도 원장에 대해 봉사할 의무를 지고 있었습니다. 영주들은 세금과 통행세를 거두었고 법원을 운영하였으며 심지어는 여행을 갈 때도 그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서로 연합하여 전통적인 봉건지배 계급에게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봉건제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것으로 인해 사회의 전체 구조가 바뀌었습니다. 봉건제의 수직적인 상하 관계는 새롭게 출현한 도시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평적인 관계들로 탈바꿈 되었습니다. 주인과 하인, 감독, 신하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서로 평등한 위치를 갖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프란시스의 말에 의하면 그와 형제들의 공동체는 이런 새로운 사회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불평등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태생적인 사회적 신분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획득된 경제력에 의해 결정되는 불평등이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은 토지의 크기와 소유물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화폐가 광범위하게 사용됨에 따라 결국에는 화폐 즉 '돈'의 소유 정도에 따라 경제적 불평등이 판가름 나게 되었습니다. 프란시스에게 있어 '돈'이라는 것은 곧 일종의 혁신적인 존재였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로 혁신적인 것이 아니라 다분히 부정적은 의미가 강했습니다. 프란시스에 의하면 결국 각 개인간의 불평등은 돈에 의해 심화되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청빈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물질적인 부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상술한 모든 변화는 평화적으로 이루어지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들의 세력이 위협 받는 것을 목격한 지주들은 신흥 중산층 상인들 그리고 수공업자들과 자주 다툼을 벌였습니다. 새롭게 형성된 도시들 사이에서도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보자면 신성 로마 제국의 프레드릭 2세와 그 뒤를 이은 교황들, 그리고 성지에 사는 기독교도와 무슬림들 사이의 긴장감 역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또한 변화의 시기에 있었습니다. 1000년이 되는 첫 밀레니엄 시기에 개혁에 대한 열망이 불타올랐으며 이러한 열망에 힘입어 12세기에는 공의회라 불리는 많은 중요한 회의들이 개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의 정점에는 1215년 개최된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프란시스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가 남긴 글속에 이러한 당시의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프란시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러한 시대적 상황 이외에도 아씨시의 글라라 역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1193년 또는 1194년에 아씨시의 한 귀족가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210년 프란시스가 아씨시 광장에서 설교를 시작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16살이었고, 프란시스보다 11살이나 어린 소녀였습니다. 프란시스가 단순한 복음 생활, 특히 그의 가난에 대해 설교한 것에 도취되어 그녀는 그와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212일 주일에 그녀는 부모 몰래 집을 나섰습니다. 그때 그녀는 이미 자기가 갖고 있던 지참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준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아씨시 근처에 있는 작은 천사들의 성모 성당에서 프란시스와 그의 형제 몇몇과 재회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지금껏 입고 있던 옷 대신 단순한 수도복으로 갈아입고 착용하고 있던 모든 장신구들을 내어놓은 다음 머리를 깎고 프란시스에게 복종할 것을 서약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단순하고 하찮은 일들을 하며 베네딕트회 수녀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훗날 프란시스에 의해 아그네스라는 세례명을 얻은 그녀의 여동생 캐서린이 그녀와 합류했습니다. 글라라와 아그네스는 프란시스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로부터 말씀을 전해 받은 산 다미아노로 이주했습니다. 여기서 글라라를 비롯한 가난한 자매들의 첫 번째 공동체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들의 공동체는 빠르게 성장해나갔고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1215년 글라라는 수녀원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1253년 임종시까지 원장으로 자매들에게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숨을 거둔지 2년 뒤 글라라는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습니다.
프란시스와 글라라는 큰 변화의 시대를 살아갔고, 그들의 삶 속에서 시대의 요구와 그들 주변 사람들의 관심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이 시대 프란시스칸들에게 큰 영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